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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감귤의유래
- 삼국시대~고려시대

제주감귤의유래 - 삼국시대~고려시대

탐라(제주도)와 한반도와의 관계기록은 삼한시대에 마한(기원전 3세기~기원 후 4세기)과의 왕래로서 비롯하며 마한이 망한 다음 백제에 복속하였다.

일본서기(日本書記)에 의하면 수인제(垂仁帝)의 명에 의해 서기 70년에 田道間守라는 사람이 상세국(尙世國)에서 비시향과(非時香果)를 가져왔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말하는 비시향과는 감귤의 한 종류가 분명하며 상세국은 제주도를 지칭한 것이 아닌가 하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다. 일본 구마모토현의 오랜 전설에 의하면 신공황후(神功皇后)가 삼한(三韓)에서 귤을 가지고 와서 그것을 심게 하였다고 한다.

고려사에 의하면 백제 문주왕 2년 (서기 476년) 4월 탐라에서 방물(方物)을 헌상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에 와서는 고려태조 천수 8년 (서기 925년) 겨울 11월에 “탐라에서 방물을 바치다”를 시작으로 “방물을 바쳤다” “토물(土物)을 바쳤다” 하는 기록이 계속되는데 그 방물과 토물의 내용은 무엇이었는가. 교역 물품이나 방물에 감귤이 포함되었다는 분명한 기록은 없지만 정황으로 봐서 감귤이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사 세가(高麗史 世家) 권7의 기록에 의하면 문종(文宗) 6년 (1052년) 3월에 “탐라에서 세공하는 귤자의 수량을 일백포로 개정 결정한다”라고 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제주도의 감귤이 세공으로 바쳐졌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세공이라 함은 임시과세인 별공에 대하여 해마다 정례적으로 공납하던 상공(常貢)을 뜻하므로 탐라의 감귤세공의 유래가 자못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제주감귤유래
- 조선시대

제주감귤유래 - 조선시대

조선시대에는 태조원년(1392년)부터 제주도 귤유(橘柚)의 공물에 대한 기록이 계속되고 있다. 세종 8년(1426년)에는 호조의 게시로 전라도와 경상도의 남해안에도 유자와 감자를 각 관서에 심게 하였다.

감귤(柑橘)이란 용어는 세조원년(1456년)에 제주도안무사에 내린 유지<세조실록(世祖實錄) 2권>에 나온다. “감귤은 종묘에 제사지내고 빈객을 접대함으로써 그 쓰임이 매우 중요하다.”로 시작된 유지에는 감귤의 종류간 우열(금귤, 유감, 동정귤이 상이고 감자와 청귤이 다음이고 유자와 산귤이 또 그 다음), 제주과원의 관리실태와 공납충족을 위한 민폐, 사설과수원에 대한 권장방안, 번식생리와 재식확대, 진상방법의 개선방안 등을 기록하고 있다.

감귤은 약용으로, 생과용으로 그리고 제사용으로 매우 중요시되었기 때문에 역대왕실은 그 수요를 충당하기 위하여 과실세를 제정하는 동시에 관영 과원의 제도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과원과 상납과실을 관장하기 위하여 중앙에 전담관서를 두었으니 고려조의 동산색(東山色), 조선의 상림원(上林園, 후에 장원서<掌苑署>로 바뀜)이 그것이다. 조선의 상림원은 고려의 동산색을 개선한 것이므로 관영과원의 제도는 고려시대부터 있어왔다고 볼 수 있다. 지방 관영과원은 관찰사와 수령 책임하에 관노비나 군졸 등으로 하여금 관리케 하였으나 때로는 성적이 부진하여 민간의 과수원에 미치지 못하였다. 따라서 관은 진상물량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민폐를 끼치게 되었고 민간 과수원의 발달을 저해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제주감귤유래 - 조선시대

6권에는 제주 3읍에 희귀한 감귤나무를 심고 장려하며, 그 관리상태에 따라 상벌을 받도록 하였다.노예계급인 노비로 있는 사람이 당감자(唐柑子)와 당유자 각 8주, 유감 20주, 동정귤 10주를 심으면 노비계급을 풀어 주었다. 일반농가는 당감자와 당유자 각 5주, 유감과 동정귤 각 15주를 심으면, 면포 30필을 상으로 주었다.그러나 감귤나무를 심은 후 관리가 소홀할 경우, 상으로 준 면포의 반환은 물론 노비로 환원하도록 하는 강경한 장려 방침이 기록되어 있다.탐라지(耽羅誌, 효종 4년, 1653년)에 실린 과원총설(果園總說)에 의하면 제주 3읍의 관과원은 36개소(제주 22, 정의 8. 대정 6), 12종, 3,600여주였으며 이때 공납과 진상을 위한 총물량은 생과 8종류 86,053개여와 약재가 116근 10량으로 계산된다. 관과원의 소산만으로는 이 수량을 채우기 쉽지 않았고 또 해난사고 등으로 수송에 애로가 많았다. 1704년 이형상 제주목사 당시에는 관과원이 42개소(제주29, 정의 7, 대정 6)로 증가되었었다. 감귤재배는 관리들의 강요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었으며 공납량의 연차적인 증가로 지방관리들의 횡포까지 가중되어 민폐가 많았던 관계로 조선말기에는 차츰 재배주수가 감소되었으며 고종 31년(1893년) 진상제도가 없어진 이후는 과수원이 황폐화 되어갔다.

제주감귤유래
- 근·현대(1910~1980년대)

제주감귤유래 - 근·현대(1910~1980년대)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는 동안, 새로운 감귤품종이 도입되었다. 이전보다는 품질이 좋은 계통이 심겨지면서부터, 점차 재래종은 없어지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과거에 감귤재배가 많았던 곳에서는 병귤을 비롯하여 당유자, 유자, 진귤, 청귤, 동정귤 이 외에도 변이(變異)되거나, 이름을 알 수 없는 몇 품종만이 남아있다.

현재 재배되고 있는 품종의 도입은 별로 오래되지 않았다. 조선말엽 박영효가 잠시 제주에 왔을 때 일본에서 도입한 감귤나무를 제주시 구남천에 있는 과수원에 심었다고 이야기로 전해지고 있으나, 감귤나무는 남아 있지 않다.

재래종을 제외한 제주에서의 감귤재배시기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902년 프랑스 출신 엄탁가(Esmile J. Taque) 신부가 제주에 오게 되어 1911년 일본에서 온주밀감 15그루를 들여와 심은 것이 현재 제주에서 널리 재배되고 있는 온주밀감의 효시이다. 서귀포시 서홍동에 있는 천주교 복지 수도원에 심었던 나무 중에 1그루가 지금까지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품종이라고 알려져 있다.

일본인 미네(峰)도 1913년에 많은 온주밀감 묘목을 도입하여, 서귀포시 서홍동에 심었던 감귤나무 품종 중에서 일부가 제주농원에 남아 있다. 이 농원에는 그 후 심겨진 하귤, 와싱톤네블, 기주밀감, 문단 등의 품종이 남아있다. 또한, 서귀포시 신효동에는 김병호가 목포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담배쌈지에 담아 가지고 온 하귤(夏橘) 종자를 파종하여 자란 품종이 아직도 남아 있다.

이와 같이 온주밀감, 하귤, 와싱톤네블, 기주밀감, 문단(文旦), 금감자, 팔삭(八朔), 금귤 등 여러 종류의 감귤을 재배하기 시작하였다. 그 당시 일본 사람들이 만든 농민회가 중심이 되어 곳곳에서 농민들에게 묘목을 나누어주며 장려에 힘을 썼다.

그러나 당시 일본에서 생산되는 감귤이 우리나라에 많이 들어와 공급량이 많아졌다. 제주에서 생산된 감귤이 비싼 값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감귤재배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 중 일부 품종만이 해방 후까지 재배되었다.

그러나 제주도의 4.3사건과 한국전쟁으로 생활 터전도 잃은 농민들이 감귤재배에 관심을 가질만한 여유가 없었다. 휴전이 되고 점차 생활이 안정되면서 밀수입되던 감귤이 없어졌다. 이때부터 몇 곳에 남아있던 감귤은 비싼 값에 팔리게 되었다.

제주감귤유래 - 근·현대(1910~1980년대)

‘대학나무’로 불릴 정도로 제주에서는 가장 소득이 높은 작물로서 빛을 보았다. 1950년대 후반부터 감귤의 재배 면적이 늘어났다.

1960년대 초부터는 감귤을 재배하고자 하는 농가들도 많아졌다. 특히 1964년부터는 농어민 소득증대 특별사업으로 정부지원에 의하여 급속히 신장하기 시작하였다.

불과 10년 사이에 10,000ha 이르렀다. 계속되는 재배면적 확대에 따라 1999년에는 25,823ha에 63만 톤 이상이 생산되어 우리나라의 제1의 과수로 자리잡고 있다.

재래품종으로는 금귤, 산귤, 청귤, 동정귤, 유자, 유감, 당유자, 홍귤, 감자, 석금귤, 편귤, 사두감, 주감 등 22개 품종이 재배되었다. 그러나 생식용으로는 맛이 없고 품질이 떨어져 새로운 품종으로 전환되었다. 지금은 병귤, 당유자, 청귤, 동정귤, 홍귤, 진귤, 광귤 또는 지각(只殼) 등 몇 품종이 내려오고 있다. 제주지역에서 재배되고 있는 감귤품종은 거의 대부분 온주밀감이다. 이외로 소량의 만감류를 생산하고 있다. 재래종 감귤은 몇 품종을 제외하고는 거의 도태되었다. 현재 상업적으로 재배하고 있는 품종은 대부분 일본에서 수입되었고, 일부 품종만이 현지 선발을 거쳐 재배되고 있다.

1954년부터 재일 교포 등에 의해 도입되기 시작한 묘목은 1970년까지 349만 주가 넘었다. 1960년대 일본에서 도입된 품종으로는 당시 장려품종으로 지정되었던 궁천조생(宮川早生)과 임온주(林溫州)가 주로 도입되어 심어졌다.

제주감귤유래 - 근·현대(1910~1980년대)

이외로 삼보조생, 흥진조생, 입간조생, 송산조생, 정관조생, 시환조생, 남감20호, 미택온주, 향산조생, 번전조생, 석천조생, 삼산온주, 십만온주, 대암5호, 청도온주, Silver Hill 등 기호성이 있는 온주 밀감이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서 우량 품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다양한 감귤품종이 도입되어 심어졌다. 수확시기에 집중 출하를 막기 위하여 극조생온주밀감과 만감류를 재배할 필요성이 있었다. 이에 따라 극조생온주밀감인 궁본조생, 유택조생, 다원조생과 늦게 수확하는 계통의 온주밀감인 금촌옥주, 오태온주, 반야온주, 만감류로는 품질이 우수한 궁내이예감, 홍팔삭, 신감하를 비롯하여 오렌지 계통의 청가네블, 길전네블, 영목네블 등이 새로 도입되었다.

장려품종으로 선정된 품종은 극조생온주밀감으로서 농촌진흥청 제주 농업시험장에서 육성한 신익조생(濟州6號)과 삼매조생, 조생종 온주밀감으로는 흥진조생(興津早生)과 삼보조생, 중생종으로는 남감20호, 미택조생, 번전온주, 구능온주, 향산온주, 그리고 만생종 온주밀감으로는 청도온주와 뇌호온주 등 11개 품종으로 지정하였다. 만감류로는 황금하귤인 제주1호, 용연만감(宮內伊豫柑), 홍팔삭(紅八朔), 청견, 신감하, 청가네블, 정방네블, 그리고 재래종인 병귤 등 8개 품종을 좋은 품종으로 지정하였다. 나머지 품종은 품종갱신을 추진하였다.

1980년대에는 재배하는 품종에 대한 정리가 이루어졌다. 즉, 궁천조생과 임온주는 품질, 수량, 저장성 등의 문제로 없애기로 하였다. 그리고 극조생온주밀감의 비율을 높이고 3월 이후에 출하가 가능한 만감류의 비율을 높이는 방향으로 추진되었다. 그러나 장려품종에서 제외되었던 궁천조생은 과일모양, 저장성 등이 좋다는 이유로 재배농가가 선호함에 따라 재배면적이 오히려 증가하였다. 1981년부터 품종갱신 사업을 적극적으로 유도하기위한 자금이 지원되었다. 이는 품질을 위주로 하는 생산체제로 전환하기 위한 계기가 되었다. 이에 따라 우량품종으로서 일남1호, 암기조생 등이 도입되어 보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