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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李仲燮)
1916~1956
한국 근대서양화의
대표 화가

1910년대
1916
9월 16일 평안남도(平安南道) 평원군(平原郡) 조운면(朝雲面) 송천리(松千里)에서 아버지 이희주(李熙周, 1888~1918), 어머니 안악(安岳) 이씨(李氏)의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형 중석은 12년 연상이고, 누이 중숙은 6년 연상이다.
1920년대
1923
평양공립종로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외할아버지 이진태(李鎭泰)의 이문리 집에 거주하였다. 학교 동기로는 화가 김병기와 시인 양명문, 작가 황순원이 있었고, 작가 김이석은 한 학년 위, 시나리오 작가 오영진은 두 학년 위에 재학 중이었다.
1926
4학년 때부터는 그림에 몰두했다. 모지랑이 붓으로 수채화 풍경을 그려 교내에서는 그림 잘 그리는 아이로 유명했다. 기타나 바이올린 악기 연주에도 능했다. 보통강 교외의 진흙을 파서 흙장난을 하는 등 짓궂은 장난도 쳤다. 5~6학년의 졸업을 전후해서도 진학 시험공부가 아니라 그림 공부에만 열중하였다.
1929
평양 제2고등보통학교에 응시했으나 낙방하였다.
1930년대
1930
정주로 내려가 오산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고, 미술부에 가입하였다. 미술부에는 1년 상급생으로 문학수, 동급생으로 안기풍을 만났다. 안기풍은 이중섭과 함께 제국미술학교를 거처 문화학원으로 함께 옮긴 동반자였으며, 문학수는 먼저 문화학원에 들어가 선배로서 이중섭을 이끌어 주었다.
1936
오산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제국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하였다. 이쾌대(李快大, 1913~1965), 김만형(金晩炯, 1916~1984) 등이 다니고 있었고 같은 평양 출신으로는 김원, 황헌영, 윤중식 등이 있었다.
1937
도쿄 제국미술학교에 싫증을 느끼고 자유로운 분위기의 문화학원 미술과에 입학하였다. 문화학원은 학생들의 개성을 존중하고 예술적인 자유교육을 중시하는 학교였다. 이중섭이 입학하던 1937년에는 2년 위 상급반에 친구 김병기와 유영국이 있었으며, 1년 상급반에는 오산학교 선배인 문학수가 있었다. 이중섭을 두고 문화학원에서는 루오처럼 시커멓게 대생하는 조선청년이 나타났다고 했으며, 이중섭은 수줍음을 잘 타면서도 노래를 잘한다는 평판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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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
문화학원에 야마모토 마시코(山本方子, 1921~ )가 입학하여 처음 만났다. 제2회 '자유미술가협회' 공모전에 <소묘A>, <소묘B>, <소묘C>, <작품 1>, <작품 2>을 출품하여 입선하였다.
1939
봄 개학과 함께 야마모토 마사코와 사귀기 시작하였다. 가을 제국미술학교 학생 나찬근 소개로 시인 구상과 처음 만나게 되었다.
1940년대
1940
제4회 '자유미술가협회전'에 <서 있는 소>, <누워 있는 여자>, <소의 머리>, <작품 1>, <작품 2> 등 5점을 출품하여 입선하였다. 12월 연인 마사코에게 그림을 그려 넣은 엽서를 보내기 시작했다.
1941
3월 문화학원을 졸업했다. 제1회 ‘조선신미술가협회전’에 <연못이 있는 풍경>을 출품했다. 이 전시에는 이쾌대를 비롯하여 이중섭, 진환, 최재덕 등이 참여하였고, 이중섭은 활동적으로 협회의 일을 맡아 추진하였다. 제5회 ‘미술창작가협회(구 자유미술가협회전)’에는 <망월>과 <소의 여인> 2점을 출품하였다.
1942
제6회 '미술창작가협회(구 자유미술가협회)'에 회우 자격으로 <소와 아이>, <봄>, <소묘>, <목동(牧童)>, <지일(遲日)>을 출품하였다.
1943
제7회 '미술창작가협회(구자유미술가협회)'에서 <망월>, <소와 소녀>, <여인>, <소묘> 등 9점을 출품하였다. 특히 출품작에 대해 높은 평가를 받고 한신태양사에서 제정한 제4회 태양상을 수상하여 부상으로 팔레트를 받았다. 8월 귀국하여 6~15일에 열린 제6회 재동경미술협회전(총독부미술관)에 참석하여 기념 촬영을 하였다. 원산으로 돌아간 이중섭은 10월에도 경성을 방문해 조선신미술가협회 주최로 열린 이쾌대 개인전(경성 화신화랑)에 참석했다.
1944
5월 29일에 마사코에게 보낸 전보에는 전람회를 위해 제작 중이라는 짧은 언급이 보인다. 6월 10일에는 전람회가 연기되어 편지가 10일 정도 늦어졌다는 것을 밝히기도 했다. 여기에 참가한다는 전시는 아마도 평양에서 개최된 <6인전>일 것으로 보인다. 평양 체신회관에서는 열린 <6인전>에는 문학수 김병기, 황염수, 윤중식, 이호연이 함께 참가했다. <6인전>에 이중섭은 ‘소 그림’을 출품했다.
1945
야마모토 마사코가 최후의 연락선을 타고 현해탄을 건너와 5월 원산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중섭은 마사코에게 “남쪽에서 온 덕이 많은 여자”라는 뜻으로 “남덕(南德)”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광석동에 신혼살림을 시작했으나 곧이어 폭격이 심해지자 교외의 과수원으로 이주했다.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하여 서울에서는 8월 18일 조선미술건설본부를 결성하였다. 이중섭은 조선미술건설본부에 회원으로 가입하는 한편 9월에는 김영주와 함께 원산미술협회를 창립하였다. 11월에는 최재덕과 함께 서울 미도파백화점 지하실의 벽화를 제작했다. 벽화는 2mx3m 너비에 150호 가량의 것으로, 왼쪽은 최재덕이 오른쪽은 이중섭이 그렸다. 이중섭이 그린 부분은 나뭇가지에 과일이 매달려 있고, 땅에도 과일들이 떨어져 있는데 아이들이 과일을 손으로 따면서 노는 장면이었다. 이때 받은 사례금으로 골동품을 사서 원산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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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
2월 28일에 결성대회를 개최한 조선조형예술동맹에 참가했다. 4월 초순에 이중섭은 원산여자사범학교 도화교사로 부임했으나 1~2주 만에 그만 두고 말았다. 집에서는 닭을 기르면서 관찰하여 닭 그림에 열중하기도 했다. 봄에 첫 아들이 태어났지만 디프테리아에 걸려 목숨을 잃고 말았다. 8월에는 평양에서 열린 8.15기념 제1회 해방기념종합전람회에 <하얀 별을 안고 하늘을 나는 어린이>를 출품해서 소련평론가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11월 구상이 회원으로 있던 원산문학가동맹 기관지 『응향(凝鄕)』의 장정을 맡아 어린아이들이 들어간 표지화를 제작했다. 이듬해 1월 이 책은 책에 실린 구상의 시와 더불어 인민성과 당성이 없다는 비판을 받아 발매 금지를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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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
6월 오장환 시집 『나 사는 곳』 속표지화를 제작하였다. 8월에는 평양에서 열린 제1차 전국미술전람회에 출품했다. 한묵의 기억에 따르면 이때 이중섭이 출품한 작품은 <투우>, <투계>, <군조> 등으로, 성난 소, 성난 닭, 성난 까마귀 떼들을 그렸다는 것이다.
1948
2월 9일 둘째 아들 태현이 태어났다.
1949
8월 16일 셋째 아들 태성이 태어났다.
1950년대
1950
한국전쟁 발발하자 소개령에 따라 일가족이 안변군 내륙쪽 과수원으로 이주하였다. 11월 원산에서 ‘원산신미술가협회’를 조직하고 초대 위원장에 취임하였다. 12월 6일 노모를 남긴 채 아내와 두 아들, 조카 이영진과 함께 월남했다. 해군 정훈실 문관으로 있던 최영림의 도움을 받아 한상돈 가족, 김인호와 함께 원산항에서 해군함정 LST(해군 후송선) 동방호를 탈 수 있었다. 12월 9일에 부산에 도착해 남구 감만동 부두의 적기(赤崎) 지구 수용소에 배치되었다. 1개월 동안 부두노동자 날품팔이로 생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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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
부산에 도착한 이중섭 가족은 정부에서 실시하는 피난민 소개 정책에 따라 종교 단체에 신청을 하였고 1월 15일 제주도로 가는 1차 출항 기선에 승선하였다. 이중섭 일가는 3일 동안 고구마를 얻어먹고 소 외양간에서 밤을 보내면서 눈길 속을 걸어서 서귀포의 가톨릭 교회에 도착했다. 이 눈길 속을 걸었던 체험은 뒷날 1955년 미도파 화랑의 개인전에 출품한 <피난민과 첫 눈>이라는 그림으로 나오게 된다. 이중섭 가족이 정착한 곳은 서귀포 서귀동 512-1 알자리 동산 마을 이장 송태주, 김순복 부부의 집이었다. 1.4평의 작은 곁방 한 칸을 얻어, 종교단체로부터 쌀을 배급받아 생계를 유지했다. 집주인 김순복은 이중섭 가족에게 된장이나 간장 등을 약간씩 나누어 주었으며, 이중섭 가족은 배급 나오는 곡식 및 고구마는 물론, 게를 잡거나 해초를 따가지고 와서 죽을 쑤거나 반찬을 마련했다. 약간 언덕진 경사면에 자리 잡은 이 알자리 집은 남쪽으로 바다가 보이고, 문섬과 섶섬이 보이는 위치에 있었다. <섶섬이 보이는 풍경>이나 <바다가 보이는 풍경> 같은 작품들에서 보이는 경치가 바로 이곳이다. 이중섭은 서귀포에서 초상화 4점을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초상화의 주인공들은 한국전쟁 때 전사한 이웃주민 세 사람과 집주인 송태주이다. 양조장 주인 강임용은 이중섭에게 도움을 주고 여러 점의 그림을 받았다. 서귀포 앞바다와 과수원을 무대로 과일을 따는 어린이들을 그린 <서귀포의 환상>은 이 시기의 대표작이다. 12월이 되어 식구들과 함께 다시 부산으로 떠나 마사코와 아이들은 감만동 적기 지구의 일본인 수용소에 머물게 하고 자신은 미군부대에 품을 팔아 모은 돈으로 부산시 동구 범일동 산기슭에 판잣집을 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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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
2월 마사코의 부친이 병환으로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남긴 유산의 상속 문제 등 때문에 마사코 자신이 일본으로 가야만 하였다. 마사코는 아이들과 함께 먼저 일본에 가고 이중섭도 뒤따라가기로 의논하여 일본행을 추진하게 되었다. 6월 17일, 마사코는 두 아들과 함께 제3차 송환선을 타고 일본으로 향했다. 이중섭은 전시회에 참여하고 종군화가단에 가입하는 한편 작품 활동도 조금씩 재개해 나갔다. 백영수의 주선으로 『자유예술』이나 전매청 기관지 등에 삽화를 그리거나, 문인 친구들이 의뢰해 온 표지화도 그리며 생활했다. 가을 무렵에는 구상이 자신의 저서 『민주고발』의 표지화를 의뢰해 오자 4점의 시안을 그려주었다. 12월에는 박고석, 한묵, 손응성, 이봉상과 함께 제1회 기조전(11.22~28, 부산 르네쌍스 다방)에 <작품 A>, <작품 B>, <작품 C> 3 점을 출품했다. 이중섭은 이 무렵 은지화를 다루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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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
5월 26일~6월 4일에 부산 임시 국립박물관에서 열린 제3회 신사실파전에 <굴뚝 1>, <굴뚝 2>를 출품했다. 이중섭은 7월 말 구상이 주선해 준 해운공사 선원 자격으로 일주일 정도 일본에 가서 가족을 만났다. 본래 선원증으로는 일본 본토에 머물 수가 없었으나 마사코의 어머니가 알고 지내던 농림대신 히로카와 고우젠(廣川弘禪)에게 특별히 부탁을 넣어 단 1주일 동안 머물 수 있도록 임시 입국 허락을 받은 것이다. 가을이 되자 통영의 유강렬은 이중섭을 나전칠기기술원 양성소의 교사로 불렀다. 이중섭은 이곳에서 기술원들을 지도하는 한편, 작품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2월 25일부터 통영 항남동(현재중앙동) 성림다방에서 40여점으로 이중섭 개인전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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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
봄에는 장욱진, 유강렬과 함께 3인전을 개최하였다. 또 마산에서도 고(故)강신석, 김환기, 남관, 박고석, 양달석과 함께 6인전(마산 비원다방)을 가졌다. 이중섭은 박생광의 초대를 받고 5월 말, 진주에 머물렀으며 진주 카나리아 다방에서는 10여점으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6월 13일 이중섭은 서울로 떠났다. 경복궁 미술관에서 6월 25일에서 7월 20일까지 열린 제6회 대한미술협회전에는 10호 크기의 작품 3점을 출품했다. 이 때 출품한 작품은 박고석의 증언에 따르면 <소>, <닭>, <달과 까마귀>였다. 서울에 올라와서 처음에는 잠시 인왕산 자락의 누상동 김이석의 집에 머물렀다. 그러다가 7월 13일에 누상동 166-10 정치열의 집 2층으로 이영진과 함께 이사했다. 이중섭은 이곳에서 10월 말까지 지내면서 서울에서의 개인전을 준비하면서 전시를 열고 성공하여 일본에 가서 가족들과 함께 할 희망을 키웠다. 빌려 살고 있던 정치열의 집이 팔리게 되자 12월 초 마포구 노고산 기슭 신수동 이광석의 집으로 옮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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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
《이중섭 작품전》(1월 18일~27일, 미도파화랑, 의회주보사 주최, 문학예술사 후원)을 개최했다. 특히 <소>가 인기가 좋아 맥타가트가 전시를 관람했을 때에는 이미 매약제가 표시되어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그는 은지화 10점을 비롯하여 유화 작품도 구매했고, 뒷날 은지화 3점을 뉴욕 근대미술관(MoMA)에 기증했다. 작품전에서는 작은 소동도 있었다. 은지화 등 일부 그림이 풍기문란하다고 하여 철거 명령을 받았던 것이다. 소동에도 불구하고 작품은 20점 이상이 매약되어 2월에는 작품 판매 수금에 열중하였다. 그러나 생각보다 수금 실적이 부진하자, 나머지 수금을 김환기에게 일임하고 대구 전시를 준비하기 위해 2월 24일 대구로 옮겼다. 대구에 거주하는 동안 대구 지역의 신문인 『매일신문』 지면에 삽화 3점을 싣기도 했다. 서울에서 가져온 작품 20여 점과 대구에서 제작한 작품 회화 10여 점과 은지화 10여 점을 더해 《이중섭 작품전》(4월 11일~16일, 대구 미국공보원)을 열었으나, 전시는 별 반향을 얻지 못했다. 이중섭은 이때 음식을 먹기를 거부하는 거식증을 나타냈다. 구상은 이중섭을 대구 성가병원에 입원시켰다. 이 시기 이중섭은 아내에게서 온 편지를 읽지도 않고 편지를 보내지도 않는 등 소통을 거부하는 모습을 보였다. 8월 26일 이광석은 김이석과 함께 이중섭을 데리고 서울로 상경한 후, 이중섭을 다시 수도육군병원에 입원시켰다. 12월 중순께 퇴원하여 박고석이 살고 있던 정릉으로 옮겨 한묵, 조영암과 자취 생활을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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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
1월 맥타가트는 지난 해인 1955년 미도파 개인전에서 구입한 은지화 3점을 뉴욕 근대미술관(MoMA)에 기증의사를 표명했다. MoMA에서는 이를 검토하고, 심의 절차를 거쳐 소장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중섭은 정릉에서 거주하면서 주변을 산책하며 스케치를 하는 등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했고, 본격적인 작품은 아니더라도 삽화와 표지화를 다수 제작해 실었다. 하지만 이중섭이 음식을 잘 먹지 못하는 거식증 탓으로 영양이 부족해 황달 증세가 심해지고 분열 증세도 보이자 7월 초 한묵은 그를 청량리 뇌병원 무료 환자실에 입원시켰다. 7월 중순 간장 질환이 악화됨에 따라 서대문 서울적십자병원으로 옮기게 되었다. 9월 6일 목요일 오후 11시 45분 서대문 서울적십자병원 311호에서 지키는 사람 없이 간장염으로 사망했다. 무연고자로 분류되어 3일간 영안실 영생의 집에 안치되어 있었다. 사흘 째 되던 날 병원을 찾은 김병기는 이중섭의 사망을 알게 되어, 친구들에게 연락을 취해 9월 11일 고별식을 가지고 홍제동 화장터에서 화장했다. 이중섭의 유골은 서대문 봉원사에 일부를 봉안하였다가 망우리의 묘지에 안치되었다. 일부는 박고석이 지니고 갔으며 또 구상이 일부를 수습했는데, 이는 1년 뒤 도쿄에서 있었던 펜 대회에 구상이 참석하게 되자 몸소 모시고 가서 부인 야마모토 마사코 여사에게 인계하였다. 망우리공원 묘지에는 차근호가 제작한 묘비가 세워졌다. 고유번호 103535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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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1960
부산 로터리 다방에서 부산의 지우들이 소장하고 있었던 작품으로 최초의 유작전이 개최되었다.
1970년대
1972
서울 현대화랑(현재 현대갤러리)에서 15주기 추모전이 열려 대성황을 이루었다. 이를 전후로 이중섭을 테마로 한 영화, 연극 등이 제작되어 일반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78
부산국제화랑에서 ‘미발표 이중섭 작품전’(7월 12일~30일)이 개최되었고 10월 은관문화훈장에 추서되었다.
1980년대
1986
호암갤러리에서 ‘30주기 특별기획 이중섭전’(6월 16일~7월 24일)이 개최되었다. 8월에는 이중섭기념사업회, 이중섭미술상 제정이 추진되었다.
1990년대
1996
3월 2일 서귀포시에서 이중섭기념관을 개관하고 이중섭거리를 지정하였다.
1997
서귀포시에서 이중섭이 거주했던 집을 매입하여 복원하였고 가나아트 주최로 서귀포 신라호텔에서 ‘이중섭특별전’(7월 1일~8일)이 개최되었다.
2000년대
2002
이중섭전시관이 개관하였다.
2003
2종 미술관으로 등록되었고 가나아트센터 이호재 대표의 기증 작품전 ‘이중섭과 그 친구들’전시가 개최되었다.
2004
1종 미술관으로 등록되었고 현대 갤러리 박명자 회장의 기증 작품전 ‘이중섭에서 백남준까지’전시가 개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