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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집, 서귀포 건축문화기행 9_1코스: 전쟁과 근대 건축

· 작성자 : 관광진흥과      ·작성일 : 2020-11-19 17:43:08      ·조회수 : 301     

제주 남쪽의 대정읍은 일제강점기에 군사기지로 사용되었다. 마라도, 산방산이 보이는 아름다운 섬의 끝에서 일제는 고사포를 겨누고, 비행기를 쏘아 올리고, 잠수정을 숨겨 놓았다. 이어 4.3의 참혹한 현장이 되었으니 이번 여행은 내내 속이 아리다.  

 

 

아픈 역사 속 근대 전쟁 시설물

남제주 비행기 격납고, 섯알오름 외

 

 

글, 사진 : 여행칼럼니스트 송세진

 

남제주 비행기 격납고와 애국기매국기

   

 

 

알뜨르 비행장과 남제주 비행기 격납고, 고사포 진지

 

알뜨르비행장의 파랑새와 비행기 격납고

5년 전만에도 ‘알뜨르비행장’은 내비게이션에 없었다. 섯알오름을 검색하여 도착하면 멀리 띄엄띄엄 비행기 격납고를 찾아야 했었는데, 이제는 확실한 이정표가 있다. ‘파랑새’- 2017년 제주 비엔날레의 전시작품(최평곤 작)이다. 처음 봤을 때는 바람 많은 제주섬에 9미터짜리 야외 전시물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아 위태위태했다. 당시 전시물 중 가장 먼저 철거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다른 작품들이 모습을 감추는 사이, 혼자 남아 몇 해째 제주의 비바람을 잘 견디고 있다. 대나무로 엮어 생긴 틈으로 바람을 지나 보내고 꿋꿋하게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는 파랑새, 100년 전 2차대전과 4.3의 풍상을 지나 보내고 끈질긴 생명력으로 살아남은 제주를 닮았다.

 

밭으로 둘러싸인 격납고

 

알뜨르 비행장과 남제주 비행기 격납고는 중일전쟁에 사용하기 위해 일제가 건설하였다. 1926년부터 짓기 시작했고 10년이 지난 후 20만평 규모가 되었다. 일제는 2차대전 최후의 접전지로 제주를 정했고, 이것이 ‘결7호’작전이다. 이는 최악의 경우 제주섬 전체가 송두리째 날아가도 좋다는 계획하에 진행된 작전이었다. 일제는 제주의 오름마다 진지동굴을 만들었고 각종 군사시설을 제주섬 끝 대정읍에 집중시켰다. 일제 말기, 비행장의 규모는 더 커져서 1945년 당시 80만평에 이른다. 이 엄청난 공사는 누가 했을까? 활주로 자리로 땅을 빼앗긴 당사자들이 노역까지 동원되었다. 활주로의 길이는 1,400m, 너비가 70m였던 이 자리가 지금은 그저 올레길 걷다가 만나는 평범한 밭이다. 지도앱의 위성사진 기능으로 보면 쉽게 활주로를 볼 수 있지만, 현장에서 확인할 수 있는 ‘물증’은 비행기 격납고뿐이다. 격납고는 건설당시부터 흙과 풀로 위장했기 때문에 단번에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게 정상이다. 모르고 보면 밭 사이에 있는 창고처럼 보이고, 실제로 주민들이 그렇게 사용하고 있다. 일제는 처음에 총 20기를 지었고, 하나가 무너졌지만 남은 19기가 기막히게 잘 보존되어 있어서 일본인들도 답사를 온다고 하니 소름 끼칠 노릇이다. 격납고들의 사이즈는 폭이 18.7m, 길이 11m, 높이 3.6m로 모두 동일하게 규격화 되어 있고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는 ‘애국기매국기’ 작품을 보면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격납고 안에 위장했던 제로센 비행기를 재현하여 2010년에 만든 박경훈, 강문석 작가의 작품이다.

 

오름 위에 자리 잡은 고사포 진지

 

내친 김에 고사포 진지까지 올라가 본다. 섯알오름 4.3 유적지 옆으로 올라가는데, 언덕을 오르는 길에서 알뜨르 비행장과 격납고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반대편으로는 초록의 들판과 야자수가 높이 자란 대정 앞바다 풍경이 그저 아름답고 평화롭기만 하다. . 이렇게 비행장과 고사포 진지가 이웃한 것 역시 일제의 치밀한 설계에 의한 것이다. 비행장과 비행기를 엄호하기 위해 여기 위치했고, 일제는 4개의 고사포를 배치하였다고 한다. 가는 길에는 살짝 헷갈리는 갈림길이 나온다. 이럴 땐 올레 표시를 따라가면 쉽게 찾을 수 있다.

 

 

섯알오름 4.3유적지

 

섯알오름 4.3 유적지

이곳은 일제의 군사시설이자 4.3의 흔적이다. 한 장소가 하나도 아닌 두개의 기구한 사연을 가졌다니 갈 때마다 한숨이 나온다. 섯알오름에 깊게 파인 두개의 웅덩이는 일제 탄약창고의 흔적이다. 일제는 물러가면서 시설물들을 파괴하거나 전쟁 물품들을 바다에 수장시켰다. 일제가 가고 미군이 들어오면서 탄약창고를 폭파하였는데 이때 섯알오름이 함몰되며 두개의 웅덩이이가 생겼다. 웅덩이 사이에 있는 콘크리트 철근이 바로 이때 나온 폐기물인데, 이것으로 끝났다면 여기는 일제의 시설물로 기억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곳은 이후 양민학살에 매우 요긴하게 쓰임으로써 슬프다고만 하기에는 너무도 끔찍한 역사의 현장이 되었다.

 

섯알오름 희생자 추모비

 

4.3은 한두마디로 확정할 수 없어 이름이 지어지지 않은 제주의 비극적인 역사이다. 1947년 3.1절 발포사건으로 시작되어 8년간 이어진 이 사건에서 수많은 제주의 양민들이 희생되었다. 공식적으로 보고된 수치가 3만여명,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은 무고한 양민들이 끔찍한 죽음을 맞아야 했고, 중산간 마을들이 불태워졌다. 이때 주민을 학살했던 이유도 많았는데 그중 지독했던 것이 예비검속이다. 예비검속은 문제를 일으킬 것 같은 사람을 ‘요시찰인’ 또는 ‘불순분자’라 하여 미리 ‘단속’했던 비인권의 극치에 해당하는 정책이었다. 예비검속은 1950년을 전후하여 제주뿐 아니라 곳곳에서 실시 되였다. 섯알오름에서는 1950년 7월과 8월 2차에 걸쳐, 218명이 웅덩이에서 학살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양민이었고, 이웃이었던 이들은 한림어업창고나 고구마뺏떼기 등에 구금되어 있다가 새벽에 일을 당했다. 정당한 사유의 처형이었다면 굳이 칠흑 같은 새벽길을 달려 어느 곳으로 가는지도 모르게 끌고 갔을 리가 없다. 이때 트럭에 실려오던 사람들은 불안과 공포의 시간들을 보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는 곳을 표시해 두려고 고무신을 하나씩 떨어트렸지만 결국 되돌아가지는  못했다. 섯알오름 추모비 앞에는 고무신과 동전을 놓아 그들을 기리고 있다.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서야 발견된 유골들은 하나로 엉켜 누가 누구인지 찾아낼 수 없었고, 이런 이유로 자손들이 ‘백조일손지묘(백할아버지의 한무덤)’ 비를 세웠다.

 

 

구 대정면사무소와 강병대교회 

 

구 대정면사무소

현재 대정현역사자료전시관은 1955년 지어진 구 대정면사무소이다. 2층짜리 크지 않은 건물이지만 전형적인 근대풍, 그리고 일제시대 관공서 모습을 하고 있어 여러 번의 증, 개축에도 이국적인 느낌이 살아있다. 유럽에서 본 듯한 15개나 되는 세로로 길쭉한 창과 토속적 재료인 검은 현무암 벽돌이 조화를 이루고, 전면 유리문이나 하얀 창틀은 이후의 여러 시대를 담고 있다. 면사무소로 사용되던 이곳은 서부보건소로 쓰였고, 지금은 제주의 옛 사진 8,200여점과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공간이 모자랄 정도로 방대한 자료가 빼곡히 전시되어 있는데 차근차근 살펴보면 제주의 옛 모습이 매우 흥미롭다. 앞서 다녀온 알뜨르 비행장의 옛 항공촬영 사진은 무언가 퍼즐이 맞춰지는 느낌이고, 100여년 전 스웨그 넘치는 소년의 옷차림에선 웃음이 절로 난다. 지나다 문이 열려 있다면 한번쯤 둘러보면 좋겠다.

 

강병대교회

 

강병대교회는 좁고 긴 외관이 독특한다. 일제시대 군사시설물들은 건물의 폭이 똑같다. 그 이유는 지붕에 규격화된 트러스를 올렸기 때문이다. 일본군 막사에 쓰이던 트러스를 올렸으니 교회의 폭은 더 이상 넓어지지 않고, 좁고 길게 지어졌다. 교회의 설립은 1952년이지만 해방 후 얼마되지 않아 625가 터지면서 일제의 군사시설은 그대로 활용되었다. 갑자기 발발한 전쟁과 최초의 육군훈련소가 이곳 대정읍에 있었다는 것만 보아도 일제가 그들의 전쟁기지를 얼마나 잘 지어 놨었는지 알 수 있다. 어쨌든 갑자기 군인이 되어 제주에까지 내려와 훈련을 받게 된 군인들이 풍토평, 우울감으로 힘들어 하자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교회가 강병대교회이다. 강병대는 사람이 아니라 육군1훈련소의 이름이다. 그 당시에는 교회뿐 아니라 이 지역의 핫플레이스로 각종 마을 행사의 장소로도 활용되었다. 현재는 공군 8546부대의 기지교회로 지금도 예배를 드리는 ‘현직’ 교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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