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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집, 서귀포 건축문화기행 6-9코스: 제주 민속 탐방

· 작성자 : 관광진흥과      ·작성일 : 2020-11-05 15:56:56      ·조회수 : 29     

옛 것은 언제나 흥미롭다. 몰랐던 사실들과 현재와의 인과관계, 남은 것들을 통한 무한상상, 특별하게 느껴지는 이질감은 여행자를 설레게 한다. 이번에는 성읍민속마을이다. 시공간을 넘나드는 건축 기행을 떠난다.

 

 

 

탐라의 중산간, 어떻게 살았을까?

성읍민속마을이 된 정의현 시가지

 

 

글, 사진 : 여행칼럼니스트 송세진

 

 

정의현 남문

 

 

제주의 내륙, 정의현

 

성읍민속마을과 영주산

성읍민속마을은 조선시대에 행정중심지였다. 서울의 ‘한양’처럼, 대부분 지방들이 조선시대 도읍지에서 현재의 중심가로 발전한 것에 비해 이 마을의 원형인 정의현은 다소 의외다. 정의현은 세종 5년(1423년)부터 1914년까지 약 500년간 제주목, 대정현과 함께 제주섬의 3개 행정구역 중 하나의 중심이었다. 이 셋 중 유일하게 바다를 접하지 않은 현청 소재지로 제주섬의 특징을 생각하면 위치가 조금 생뚱맞다. 항구를 접하지 않아 상공업의 중심이 될 수도 없고, 한양에서 오는 주요인사의 관문도 아니다. 생활자들의 접근성을 생각한다면 지금의 성산 즈음에 있어야 할 것도 같은데 말이다. 어업을 중심으로 생활하는 섬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바다에서 8km쯤 떨어진 중산간 지역은 사람이 활발히 왕래하기엔 조금 어려운 곳이 아닌가? 마을 뒤편으로 주산인 ‘영주산’을 둔 것도 그렇고, 한양 정부에서 섬생활의 실상과는 관계없이 풍수지리와 일반적 도읍의 모습대로 계획한 도시가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마을의 모양도 서울의 강남처럼 구획이 잘 나누어진 건 아닐까? 뭔가 자연 발생적인 느낌이 없다. 제주의 관문으로 꾸준히 현대화를 이룬 제주시(제주목)나 일제가 일찌감치 자리잡고 군사기지로 만든 대정읍과 비교하면, 정의현은 ‘현대’의 흔적이 없다. 조선이 망한 후 정의현 도읍지는 점차 오지 마을이 되었고 아이러니지만 그 덕분에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했다. 조선시대 제주 중산간 지역의 생활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게 된 이유이다.

 

성읍민속마을의 보호수

 

성읍마을 주변에는 관광식당과 토산품점이 많다. 작년부터 중국 여행자들이 급감하고, 코로나 등의 이유로 기세가 꺾였지만, 한때 동남아 단체관광객을 실은 관광버스가 많이 들어와 정의현성 주변의 작은 도로가 꽤 복잡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때나 지금이나 정작 민속마을 자체를 여행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근처까지 와서 방송에 나온 토속음식점에서 식사를 하고 급히 다음 여행지로 이동을 한다. 잠깐 소화도 시킬 겸 마을길을 휙 둘러보고 지나친다. 굳이 여행지에 대해 다 알 필요는 없지만 이곳이야 말로 ‘아는 만큼 보이는’ 흥미로운 곳인데 썰렁한 민속마을이 조금은 안타깝다. 시간을 여유 있게 두고 남문 앞 해설사의 집에서 해설 요청을 한다면 500년 전 제주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정의현성을 오르는 사람들(초상권 사용허가 완료)

 

복원된 정의읍성은 1km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마을에는 초가 45여 가구에 100여명이 지금도 거주하고 있다. 다시 말해 과거의 현청 소재지 치고는 미니 사이즈다. 발품이 아까운 여행자에게는 조금은 간편한 소식이다. 와중에 있을 건 다 있다. 조선시대 행정, 군사, 교육의 중심지였으니 당연한 말이다. 읍성에 문은 남, 서, 동으로 세 개, 북쪽은 임금님이 계신 곳이라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 그 멀리 있는 한양인데도 임금님과의 다이렉트는 무엄한 일이었나 보다. 성문 앞에 돌하르방은 4기씩, 원래의 기능대로 성을 지킨다. 마을 전체를 한 눈에 보려면 남문에 오르면 된다. 비교적 구획이 딱딱 떨어지는 제주 옛집들이 자리하고 있고, 바로 앞에 고평오 고택, 왼쪽 멀리 정의향교, 그 뒤로 고창환 고택, 마을 가운데 600년 된 팽나무, 1,000년 된 느티나무가 있다. 정면에 보이는 산은 영주산이다.   

 

이름이 남아 있는 가옥들은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이들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현청 소재지로써의 정의현과 마을의 모습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상상해 볼 수 있다.

 

 

정의향교에서 객사까지  

 (왼)정의향교 위패 원본   (중)정의향교 대성전의 본래 현판   (오)정의향교 건립시 사용된 기둥받침

정의향교는 전국 230여개 향교 중 가장 작다. 대정읍이 생기면서 정의현이 갈라지는 등, 여러 이유로 이사를 다섯번이나 하고, 일제 탄압 등 풍파를 거치면서 점차 축소되었다. 그런데 이사를 할 때마다 이삿짐을 잘 챙겼는지 본래의 위패, 현판, 주춧돌 등이 꽤 남아 있다. 보통 향교들이 남향인데 동쪽을 향하고 있는 점도 특징이다.

 

정의향교 대성전

 

조선시대 ‘향교’라 하면 성현을 기리고, 지방교육을 담당하는 역할을 하였다. 지금 교육 기능은 사라졌지만 제사 기능은 남아있어 대성전에 공자를 비롯한 5성, 송조 4현 그리고 설총을 비롯한 해동 18현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대성전의 기둥을 받치는 주춧돌이나 목재는 1408년의 것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여기에 창건당시 위패도 소중히 모셔져 있다. 보통 왕릉이나 궁궐과 마찬가지로 가운데 길은 영령들이 다니는 곳이고, 오른쪽으로 들어가 왼쪽으로 나오는 것이 예의, 여행자들은 대성전이 열리는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이곳을 관람할 수 있다.

 

정의향교 대성전 (앞줄 5성, 뒷줄 해동18현 위패)

 

그렇다면 이런 곳은 무슨 재미로 둘러보나? 글쎄…… 역사의 퍼즐 맞추기를 좋아하는 나는 일단 게시판을 유심히 살핀다. 한자 까막눈이지만 대략 한글과 한자를 매치해 본다. 그리고 대성전에 들어가 성현들의 이름과 위패를 찾아본다. 일단 제일 높은 데에 공자님이 계시고…… 역사책에서 보았던 설총, 정몽주, 이황, 이이, 송시열…… 조광조…… 어? 조광조? 조광조도 있네? 주초위왕으로 돌아가신 분? 아, 꼭 유교, 성리학자가 아니어도 여기 들어가네? 짧은 역사 지식을 동원하여 조광조 스토리를 꺼내 본다. 개혁은 역시 화를 부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혁을 시도했던 인물, 결국 향교에 모셔진 걸 보면 그 당시에는 상당한 영향을 미쳤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아무리 조광조가 훈구파를 흔들어도 그렇지, 사람을 역적으로 몰아 죽이기까지 할 필요가 있었나? 예나 지금이나 집단의 권력욕이 이렇게나 무섭다. 

 

안할망당으로 가는 올레길

 

향교에서 나오면 가까이 고창환 고택이 있고, 안할망당쪽으로 걷는다. 할망당 가는 입구는 전형적인 제주 올래이다. 돌담 사이로 좁은 골목이 이어지고 할망당 앞은 무성한 나뭇잎이 초록 그늘을 만든다. 할망당은 마을 중앙 쪽에 자리잡고 있지만 좁은 올래와 아늑한 분위기로 마치 숨은 장소처럼 느껴진다. 할망당을 지나 객사쪽으로 향하면 마을 중앙에 느티나무와 팽나무가 있다. 각각 1,000년, 6000년을 살며 이곳의 면면을 지켜보았을 나무들이다. 잠시 쉬어 갈 수 있다면 영광일 텐데 올 때마다 만석이다. 사람 보는 눈 다 똑같다. 누구나 앉아 보고 싶은 그늘이다.

 

 

평등한 제주의 옛집  

 

성읍민속마을의 초가 돌담과 눌

 

제주 전통가옥은 초가다. 기와는 일제강점기에 왜 기와가 들어오며 조금씩 보급되다가 빠르게 현대화가 진행되어 기와를 올린 옛집을 찾아보기 어렵다. 향교나 관청은 기와가 올려져 있지만 다른 집들은 모두 초가다. 그러니 얼핏 보아서는 잘사는 집과 못사는 집, 벼슬있는 집과 평민의 집이 구별되지 않는다. 지붕 위에 올린 것도 육지부는 볏짚을 사용하지만, 제주는 벼농사를 짓지 않아 ‘띠’라는 것을 쓴다. 이것은 바람에 잘 견디고 습기에 강해 제주 지역의 지붕으로 사용하기에 좋았다. 바람이 많은 곳이라 지붕의 기울기 또한 완만한 것도 특징이다.

 

다른 지역에 비해 기온이 높은 제주는 구들이 없다. 부엌에서는 취사를 위해 불을 지피고, 방마다 불을 넣지는 않는다. 이런 주거 문화는 현대까지 이어져 1980년대에 지어진 집들도 보일러 시설이 없는 경우가 많다. 이후 전기 패널을 깔아 난방을 보충한 흔적들을 찾아볼 수 있다.

 

(왼)성읍민속마을 남문통   (오)성읍민속마을 연자방아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된 집을 비롯해 중요한 건축물이나 장소에는 게시판 설명이 잘 되어 있다. 이를 보면서 그 당시 정의 고을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집들의 기능에 따라 여관집, 대장간집, 객주집 등 별명을 가지기도 했고, 남문 앞 고평오 고택의 경우 안거리, 밖거리, 고팡(창고), 모커리(곁채), 통시(화장실) 등 제주 전통가옥의 구성을 다 갖추고 있어 제주 전통초가의 모델하우스 역할을 한다. 지금은 이 고을 원님만 마셨다는 ‘남문통’ 우물도 말랐고, 더 이상 연자방아를 쓰지도 않지만 주민 100여 분이 마을을 지키며 살고 있다. 사람이 살지 않으면 빠른 속도로 황폐화되는 것이 건물이고 마을이다. 때로는 여행자들 때문에 시끄럽고, 주변에 편의시설도 없는 ‘민속’ 관광지, 한 집 걸러 빈 집들은 저녁이 되면 조금은 을씨년스럽기도 할 터, 불편해도 지켜 주시는 분들이 있어 이곳이 ‘마을’로 연명하고 있다.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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