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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집, 서귀포 건축문화기행2 - 2코스: 추사 따라 가는 길

· 작성자 : 관광진흥과      ·작성일 : 2020-09-08 16:53:14      ·조회수 : 85     

그림은 집이 되었고, 서체는 브랜드가 되었다. 소, 말에게나 주던 꽃은 시화가 되었고, 모두가 흉하다고 하던 오름은 글씨가 되었다. 당대에는 문인으로만 불렸지만 선생님, 학자, 디자이너, 캘리그래퍼, 미식가, 집착남, 순정남이었던 추사 김정희, 그의 취향은 고스란히 문화가 되었다.

 

 

취향, 문화가 되다

추사 따라가는 길

 

 

글, 사진 : 여행칼럼니스트 송세진

 

추사의 유배길을 나타내는 추사관 계단

 

 

 

추사의 시, 서, 화 그리고 집

추사가 제주 유배 시 쓴 것으로 추정되는 관음경

 

추사 김정희가 제주에 유배 왔던 8년 3개월, 제주섬에 축복이 내렸다. 그 자신도 추사체를 완성하고 세한도를 그렸으니 영 낭비한 시간만은 아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너무 가혹하다. 사후에 글씨가 좋네, 나쁘네 하는 게 무슨 소용인가? 정작 자신은 습도와 바람에 뼈가 시렸을 것이고 맞지 않는 음식에 늘 혀가 깔깔했을 것이다. 모든 게 결핍된 유배 생활에 유일하게 넘쳐나는 건 시간, 위리안치 되어있던 집 안에서 다른 사람보다 열배쯤 느린 시간을 살았을 것이다. 얼마나 외로웠을까? 한없는 고독 속에서 얼마나 많은 생각과 좌절과 슬픔과 후회와 통한을 곱씹었을까? 벼루 열 개를 깨고서야 추사체가 완성되었다고 하는데, 그 먹을 그냥 갈았을 리가 없다. 이를 갈며 먹을 갈았을 것이다.

 

그나마 취향이 그를 살렸다. 추사는 갇혀 있는 처지였지만 좋아하는 게 많았다. 차를 좋아했고, 음식을 좋아했고, 금석문에 심취했던 것으로 보아 글씨를 좋아하고 그로부터 무언가를 발견해 내는 집요함도 가지고 있었다. 책을 좋아했고, 고마움을 표할 줄도 알았다. 취미 부자는 우울할 틈이 없다.

세한도와 그에 대한 찬사들

 

추사는 아름다움을 보는 눈이 있었다. 수선화는 선비들이 고귀하게 여기던 꽃이었다. 그런 꽃이  제주에 지천으로 피었는데, 소, 말에게나 주는 잡초 취급에 적잖이 놀랐다. 추사는 수선화로 시를 쓰고, 그림을 남겼다. 박쥐를 닮았다는 단산(바굼지오름)은 마을 사람들이 흉하게 생겼다며 액운을 막기 위해 방사탑까지 세웠지만 추사는 그 산세에 반했다. 추사는 단산을 보고 ‘뫼 산(山)’을 썼다고 한다. 어떤 이들은 이것이 추사체의 시작이라고도 한다. 뿐인가? 차를 좋아해 친구인 초의선사를 꽤나 귀찮게 했다. 편지 중에는 ‘차가 떨어지게 생겼다, 당신은 오지 않아도 좋으니 차부터 보내라.’는 말도 나온다. 이렇게 졸라대는 친구 때문에 초의선사는 제주까지 와서 차 나무를 심어주고, 여섯 달을 머물렀다. 책을 보내준 역관 이상적에게는 그림을 보내 감사함을 표했다. 이것이 바로 ‘세한도’이다. 이상적은 신이 나서 다음 번 출장길에 중국까지 들고 가 자랑을 했고, 그걸 본 이들은 감탄의 글을 남겼다. 요즘 말로 하면 댓글이다. 그게 14m나 된다. 그리고 세한도는 현대에 이르러 여러 건축물에 영감을 주었다.

 

 

추사가 그리고, 승효상 짓다

 

추사관 외관

 

추사관은 세한도를 모티브로 승효상 건축가가 설계하였다. 전국에 세한도를 모티브로 한 건축물이 몇 군데 있지만 내실을 따지자면 추사관이 제일이 아닐까 싶다. 외관뿐 아니라 내부에 담고 있는 컨텐츠와 구석구석의 의미가 추사의 삶과 업적을 잘 표현하고 있다.

 

외관은 삼각형 지붕, 동그란 창문, 높이 자란 소나무가 그대로 세한도이다. 여기에 제주의 돌담이 둘러쳐 있고, 입구는 지하를 향해 있다. 출입문으로 내려오는 길은 양쪽 계단이 비탈길로 이어져내있다. 아래서 보면 기하학적 무늬로 아름다운데 내려올 때는 발을 조심해야 하는, 편치 않은 입구이다. 이것은 추사의 유배길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추사관 전시

 

전시공간은 추사의 작품과 탁본, 편지 등이 전시되어 있다. 기본적으로 글씨를 보아야 하겠지만 특별히 놓치지 말아야 할 작품은 앞서 말한 세한도와 의문당 현판이다. 의문당 현판은 추사 선생이 대정향교 동재에 써 준 것으로 이곳에 원본이 전시되어 있다. 추사의 글씨를 시대별로 나눠 감상한다면 추사체가 완성되는 과정을 관찰할 수 있겠다. 동선을 따라가면 마지막으로 추사홀에 이르게 된다. 추사홀은 세한도의 삼각지붕에 해당하는 공간으로 동그란 창으로부터 빛이 들어온다. 문득 빛과 창의 소중함이 느껴지며 세한도에 창을 괜히 내어 그린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선생이 원했을 소통의 열망이 아니었을지? 한편 추사홀에 붙은 ‘판전(板殿)’이라는 글씨는 돌아가시기 3일 전에 쓴 유작으로 서울 봉은사 현판이다.

 

 

추사의 길과 대정향교

 

가시 많은 탱자나무 위리안치

 

추사관 뒷편에는 선생이 유배시 머물렀던 집을 복원해 놓았다. 실제로 선생이 머물렀던 강도순의집터에 있다. 집밖을 나올 수 없는 위리안치형이었기 때문에 집 둘레에는 가시가 있는 탱자나무를 심었다. 이와 함께 추사가 좋아했던 차나무도 심어 놓았다. 제주 전통가옥은 다른 코스에서도 볼 기회가 있기에 간단히 둘러보고, 대정현성을 따라 동네 구경을 해 본다.

 

대정현성 위로 보이는 추사 유배지의 소나무

 

뒷 골목을 조금만 따라가보면 추사 선생의 유배 초기 거처였던 송계순 집터가 있다. 지속적으로 복원중인 대정현성 위로 추사 선생 적거지의 소나무가 보인다. 골목을 돌아 내려오면 우물터였던 두레물이 있다. 지금은 용천수 개발로 사용하지 않지만 1970년대까지 이 마을에 물을 공급했다. 우물의 입구 역시 돌담이 이끌어주는 올레다. 제주 분위기 물씬이다.

 

대정향교 앞 세미물

 

이번에는 대정향교이다. 지겨운 유배 생활 중 제자 양성은 그나마 자신의 존재가치를 드러내는 즐거움이었을 것이다. 향교 앞 세미물은 선생의 찻물로 알려져 있다. 차를 마시는 이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물이니 세미물이 얼마나 맑고 달았을 지 알 수 있다. 지금은 그저 물이 흐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지만, 당시만 해도 인성리와 사계리의 수원지였다고 한다.  

 

대정향교

 

향교 역시 제주의 검은 돌담이 둘렀다. 겸손을 가르치려는 듯 문 역시 낮고 소박하다. 위패가 모셔져 있는 대성전은 새의 날개처럼 지붕이 활짝 펼쳐져 있다. 기둥은 덧기둥을 써서 지붕을 든든히 받치고 있다. ‘이건가? 저건가?’ 이곳에 오면 자꾸만 두리번 거리게 된다. 향교에는 공자가 있는 곳에 삼강오륜목을 심는 전통에 따라 팽나무와 소나무를 심었다고 하는데 이 중 소나무가 세한도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하니 보이는 소나무마다 예사롭지가 않다.

 

쪽문으로 대성전과 단산이 보이는 대정향교

 

뭐니뭐니 해도 이 향교의 풍경을 완성하는 건 멀리보이는 단산과 산방산이다. 제주니까 가능한 일이다. 저 단산을 보고 추사 선생 특유의 ‘뫼 산(山)’ 자가 나왔다지? 그러고 보니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 산이고 꽃이고 보기 나름이구나……. 나의 먹고 자는 것, 나의 기호는 무엇일까? 누군가에게 일획이라도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 다시한번 그의 관점과 취향에 감탄하며 고개를 숙여 작은 문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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